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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오타니 쇼헤이가 한국을 방한했습니다. 그런데 오타니는 방한을 하면서 와이프와 같이 방한을 했는데요. 와이프의 이름은 다나카 마미코로 전직 프로 농구선수였습니다. 두 사람의 방한이 화두가 된 이유는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모습이 처음이었고, 방한하기 전에 오타니가 깜짝 결혼발표를 했지만 이름이나 신상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오타니 선수의 팬으로서 이번 기회에 오타니에 대해서 자세하게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오타니 쇼헤이
오타니 쇼헤이의 만다라트 계획표

 

목차
1. 야구에 대한 열정
2. 어린 시절
3. 방한 및 논란

 

1. 야구에 대한 열정

 

오타니는 어렸을 때부터 성공하기 위해서는 "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운이 없으면 나중에 비운의 선수로 남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운이 좋아질까 고민을 하던 오타니는 고민을 하다가 특이한 계획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계획표가 바로 아래 사진과 같은 만다라트 계획표 입니다.

 

오타니 쇼헤이
오타니 쇼헤이의 만다라트 계획표

처음에 썼던 만다라트 계획표에서는 "인사 잘하기", "쓰레기 줍기" 등 다양한 선행들이 적혀있었습니다. 선행이 습관화되면 자연스럽게 운이 딸려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쓰레기를 주울 때 "다른 사람이 무심코 버린 운을 줍는다"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타니는 야구에 관련된 계획들도 매우 엄겼했습니다. 

체격을 키워야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고등학교 때 20kg을 찌우겠다고 목표를 세웠는데, 이 목표를 위해서 하루에 밥만 13공기씩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선수들 같은 경우에는 밤에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열심히 야구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오타니는 숙면만큼은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서 하루에 꼭 12시간씩 잠을 자는 철저한 관리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철저한 통제력 때문인지 오타니는 10대때 벌써 시속 160km의 공을 던지며 아마추어 신기록을 세웠고, 성인이 되던 시점에는 일본 프로팀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선수들이 가득한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일본의 "닛폰햄"이라는 프로팀이 오타니를 신인으로 뽑았고, 오타니는 투타 겸업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투타 겸업은 야구계가 뒤집힐만한 파격적인 대우였는데, 왜냐하면 이때까지만 해도 야구에서 투수는 공을 잘 던지기만 해도 되었고, 타자로서의 기대치가 낮았기 때문입니다.

 

공을 던지는 것과, 배트로 공을 치는 것은 서로 다른 분야로 여겨졌고, 한 선수가 이 둘을 다 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의 야구 역사상 투타 겸업을 완벽하게 해낸 인물은 100년전 활약했던 베이브 루스만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이 일리가 있었습니다.

 

오타니는 투타 겸업을 하면서 처음에는 큰 두각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을 던질 때마다 생기는 오타니 특유의 표정 때문에 상대팀이 어떻게 공이 날라올지 예상할 수 있어서 저조한 성적을 보여줬습니다.

오타니 쇼헤이

하지만 오타니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훈련량을 두 배로 늘렸고, 집에서는 상대팀 선수들의 경기 비디오 영상까지 분석하면서 상대팀의 약점을 파고들었고, 이듬해 오타니는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리그 전체 투수들 중 전체 3위라는 믿기지 않는 발전을 보여주었고, 그가 던진 공은 시속 162km라는 일본 역사상 최고 신기록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타자로서도 활약을 해서 투타 겸업을 완벽하게 해냈다는 칭찬이 이어졌습니다. 언론에서는 그에게 자신의 재능이 무엇이라고 물었고, 오타니는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 능력"이라고 애기했습니다.

 

2. 어린 시절

 

오타니가 지금처럼 성공한 야구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오타니 쇼헤이는 1994년 7월 5일 일본 이와테현 오슈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도오루는 야구 선수, 어머니는 가요코는 배드민턴 선수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에게서 좋은 운동 신경과 큰키(193cm), 온화한 성격을 물려받았습니다.

 

오타니의 부모는 오타니를 키울 때, 3가지를 중심으로 키웠다고 합니다. 

 

1.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2. 아이들을 꾸짓지도, 부부싸움을 하지도 않았다

3. "끝까지 노력해서 이뤄내는 것"의 중요성.

 

위의 3가지를 중심으로 오타니를 키웠다고 합니다.

 

오타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중학교 때는 시속 140km의 직구를 던졌으며,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야구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는 사사키 히로시 감독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또한 만다라트 계획표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오타니의 목표는 시속 160km 직구였고, 고등학교 3학년때 이 목표를 이뤘다고 합니다.

 

오타니는 고등학교 때에도 투타겸업을 했었습니다. 그는 투수로서 2012년 봄 고시엔에서 우승을 이끌었고, 타자로서도 2012년 여름 고시엔에서 3홈런을 기록했습니다. 그 뒤로 오타니는 일본에서 주목받는 스타 선수가 되었습니다.

 

3. 방한 및 논란

 

이렇게 뭐든지 완벽하게 보이는 오타니한테는 10년동안 동고동락했던 통역사가 있었습니다. 10년동안 오타니의 최측근으로 지낸 만큼 오타니 선수에게 가족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가족같은 사이였던 둘은 한 사건으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통역사가 오타니의 개인계좌에서 수십업을 횡령한 것입니다. 

사실 통역사는 도박중독을 가지고 있었고, 예전에도 도박빚 때문에 60억을 오타니가 대신 빚을 갚아준 적이 있었죠. 

그 뒤로, 통역사는 앞으로 절대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오타니 선수에게 말했지만,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단 측은 이 사실을 알고 통역사를 해고했고, 오타니 선수는 한국 방한을 하던 중 최측근을 잃어버렸습니다.

 

오타니 선수의 한국 방문은 통역사 뿐만 아니라 다른 의미로 화재가 된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 얘기했던 것처럼 오타니 선수가 숨겨진 아내와 같이 방한을 해서 큰 화재가 되었고,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도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태극기가 들어간 게시물을 4번을 올리면서 한국에 큰 호감을 표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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